지난주에 제가 편튀(편지만 놓고 튀기)를 해서 조금 당황스러우셨나요? 여행 전에 바쁜 일들을 마쳐놓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여행을 떠나오니 더 바쁘네요. 매일매일 관광지도 돌아다녀야 하고(이왕이면 효율적인 동선으로), 걸어다니며 동유럽의 추위에도 맞서야 하고, 밤이면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과 사진 정리하며 수다도 나눠야 하고, 밥이랑 후식도 든든히 챙겨먹어야 하고(돈을 아끼기 위해 에어비앤비에서 요리도 해야하고). 여행까지 와서 뭐 이리 할게 많나 싶지만, 또 여행까지 왔으니까 하는 것들이니까요.
저는 일주일동안 부다페스트, 비엔나, 프라하를 여행했습니다. 내일은 런던으로 이동하고, 지금은 프라하 숙소의 창가쪽 침대에 누워 모두가 잠든 가운데 조용히 글을 쓰는 중이에요. 연말의 동유럽은 정말 반짝반짝했어요. 안 그래도 복작복작한 크리스마스 여행객들 사이에서 친구들과 복작복작 쏘다니니, 날씨는 추워도 마음 한 켠은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아 맞다, 다들 크리스마스는 잘 새셨는지 모르겠어요. 누구에게는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고, 누구에게는 별 날 아니었을 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그저 매년 돌아오는 무언가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크리스마스는 매년 돌아옵니다. 12월에서 25일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이상이요. 우린 작년에도 크리스마스를 맞았고, 내년에도 크리스마스를 맞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년 돌아오는 것을, 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요? 돌아올걸 알고 있는 무언가가 지나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지나감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엊그제 저녁, 프라하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야경만 간단히 보자며 나섰던 카를교에서, 요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그 다리를 건너면서 느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코 끝이 찡해졌습니다. (날이 워낙 추웠어서 코가 찡해질만도 했겠지만요) 카를교에는 카톨릭 성인들의 동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요, 그중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몇몇 조각상들 앞에서는 소원을 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다리 한 곳에 멈춰서서 조각에 손을 얹고 어떤 소원을 빌었습니다. 추운 밤 강바람을 뚫고 다리를 건너오며 떠올랐던 어떤 소원을. 눈을 질끈 감고 빌었어요.
그때 제 마음 속으로 속삭여졌던 것처럼 그동안 그 다리에서 속삭여졌을 무수한 소원들의 행방이 궁금했습니다. 마음이 웅장해지며 동시에 차분해지는 그곳에서 빌어진 소원들은 왠지 이뤄지기 어려운 소원들이었을 것 같았어요.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쉽게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믿고있는 소원을 빌게 되지 않았을까요. 보통 될 것 같은 일에 대해서 그렇게 간절히 빌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그 동상들이 좀 힘든 일도 다 들어줄 것 같이 생기기는 했거든요) 아무튼. 다리를 건너며 제 코 끝이 찡해졌던 것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곳을 스쳐갔을 억겁의 사람들, 이곳에서 빌어졌을 그들의 소원들, 이곳에 남겨졌을 그들의 마음들이 아득했기 때문이었나봅니다.
크리스마스도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빌게 만듭니다.
울면 안된다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으면서까지 선물을 받고싶게 만듭니다.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거라고 이미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바라게 만듭니다. 내 바램과 네 바램. 어쩌면 아무 관련이 없을지도, 하지만 어쩌면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 바램들이 가여우면서 기특합니다. 가여운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기 때문이고, 기특한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리는 건너가면 건너오고, 크리스마스도 지나가면 돌아옵니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바램들이 이뤄지기도 하고, 단념되기도 합니다.
올해 우리가 각자 품었던 바램, 빌었던 소원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요. 현실이 되었을까요? 포기되었을까요?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 소원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앞으로 또 새로운 소원을 빌게 되겠지요. 설령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고 할지리도요, 우린 기특하게도 또 소원을 빌고 말겁니다. 오래 전에 포기되었던 소원이 몰라보게 꿋꿋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구요.
크리스마스는 또 한 번 지나가버렸다는 것.
그치만 다음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돌아온다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마음을 잡고 올해를 바라봅니다. 나의 돌아오지 않을 올해를, 그리고 돌아올 새로운 해를. 빌었던 소원과 빌어질 소원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순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