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한 온도의 바람이 코끝을 휘젓는 밤입니다.
며칠 전 이 시원한 바람을 처음 맞닥뜨린 이후로, 저는 속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있어요. 올해는 기필코 여름이 오고, 있다가, 가는 것까지를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려고 했는데요. 열기에 잠깐 마음이 들뜬 새 이놈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버렸지 뭐예요. 치사한 자식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어떻게 카아아장 더울 때, 모른 척 쌔앵 하니 뒤돌아 버릴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물론 이러다가 다음주쯤 누가 돌아왔게~ 하면서 백스텝을 밟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요.)
이토록 화를 내는 제가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겠어요. 저 스스로도 이 분노의 마땅한 원인을 잘 모르겠습니다. 더위에 맞서 부리던 기승이 머쓱해져서인 것 같기도, 코앞까지 다가온 가을이 무서워서인 것 같기도, 한 해가 또 그냥 저냥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참해서인 것 같기도 해요. 이유 많네요 뭐? 암튼 이곳은 아주 심통이 나 있는 상황입니다 오바.
후- 창문을 열고 식탁에 앉아 맘을 식혀 봅니다.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을 맞으며 이 불가해한 심통을 들여다보자니, 결정적이고 솔직한 하나의 추측이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제 이번 여름이 유난히 많은 이름들과 그 위에 어린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낯 부끄러우니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저는 지하철 문이 열릴 때 그저 자기가 탈 것만 생각하고 떡하니 서있는 사람들이 참 미워요. 내릴 사람 먼저 내릴 수 있게 당연히 옆으로 비켜 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내리는 사람은 생각의 반경에도 안 끼워준다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 보면 세상 혼자 사는 줄 아는 것 같아서 서운하고 괘씸하고 그래요. 제 신념은 그 정반대에 서있거든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가끔 그런 것처럼 보여도, 절대 아니다." 제가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철학 중 하나입니다.
이 명제가 참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 여름은 아주 많은 이름들을 제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새로 만난 이름들, 오랜만에 만난 이름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준 이름들. 그 모든 이름들이 낚시찌처럼 내려와 푹푹 찌는 열돔에 구멍을 뚫어주어서 여름내 숨을 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크게 깨달은 게 있는데요, 다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제게는 삶을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 일례로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떤 동력으로 사는지를 고민할 틈도 없었는데,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거나 선생님 또는 친구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요. 대학교 1학년 때 한창 합창단에 열심이었던 시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 이후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는데, 오랜만에 그럴 일이 자주 있던 여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