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년에 한바퀴를 돌면서 많은 사람에게 행운을
주진 않았지만 줄 예정이며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를 표절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진짜로 영국에 있습니다!
영국 여행을 계획한 후부터, 영국에서 보내게 될 메일의 시작은 꼭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행운의 편지, 다들 아시나요? 아주 오래 전에 유행했던 편지인데요. 저는 지금 정말로 영국에서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수백수천 번 쓰여졌을 문구를 당당히 현실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지난 몇 주간 이 순간을 고대해 왔습니다ㅎㅎ.
여행 첫 날이 언제나 그렇듯, 지금 제 두 발은 욱신욱신 뜨거운 상태입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온 터라 피곤하기도 하구요.. 이럴 줄 알고 새벽에 공항과 비행기에서 편지를 미리 써보았습니다. 공항이란 곳은 마침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거든요. 오늘의 편지에는 밤이 아닌 새벽을 담게 되었네요. 더욱 특별할 수도 있겠습니다. 따끈따끈한 런던 사진들도 덧붙입니다. (삐빅- 실제로 지금 영국은 엄청 추워요.. 입김이 나오는 정도랍니다?)
- 새벽 5시 31분, 공항에서.
이른 시간인데도 공항은 북적북적 합니다. (고등학교때 도서관 이름이 Book적Book적이었던 게 떠오르네요.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책이 쌓여있는 곳이라는 뜻도 되고, 학생들이 도서관을 많이 찾으면 북적북적해진다는 뜻도 되고. 고등학교 시절동안 도서관에서 빌려서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건 참 안타깝지만요..)
공항에 오는 길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평생 공항과 가까운 곳에 살아왔지만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이야기.. 제 꿈은 PD이고 저는 극심한 N이라서 이런 캐릭터와 설정을 종종 떠올리곤 하는데요, 너무 뻔한 설정이라 시나리오가 까이는 상상까지 했습니다ㅋㅋ. 공항이라는 곳은 참 특이합니다. 언젠가 병원에 있는 카페에서 알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신원호 감독님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첫 대본 리딩 때 이런 말을 하셨었는데요. “왜 그동안 저희가 했던 드라마에 병원씬이 그렇게 많았나 생각해봤더니, 사실은 삶의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도 제일 극적인 부분들이 다 병원에 있더라고요.” 그 드라마를 보고, 병원에 오고 가는 사람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었습니다. 아무튼, 병원과 같이 공항도 특이한 공간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우선 공항은 이동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이동하기‘ 위해 ’머무는‘ 공간이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느리게만 느껴집니다. 그치만 비행기를 타고 나면, 이제 공항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고 공항에서 보냈던 시간은 신기루처럼 느껴집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공간 속에서, 아마 다신 볼 일 없을 사람들을 무수히 지나치는 곳이 공항입니다.
빠더너스 영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로 태어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현준님이 일본 온천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당연하게 온천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벗어나기 어렵도록 정해진 삶일 테고, 어떻게 보면 안정적인 선택지가 하나 더 있는 삶일 테죠. 그들의 삶과 내 삶은 얼마나 다를까요? 말라가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도, 이곳에 쭉 살아온 사람과 한국에서 온 내가 느끼는 이곳은 얼마나 다를까 생각이 듭니다. 평생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것을 먹고 다른 풍경을 보고 자라온 각각의 삶, 그 사이에 있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의 차이는 아득할 정도로 크게 느껴져요.
공항에 오니 그 감각의 차이를 또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공항에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느끼는 공항은 모두 다르겠지요. 이미 한국에서 한 차례 떠나 온 제가 이곳을 떠나는 것과, 이곳에 평생 살았던 사람이 이곳을 떠나는 것의 감각은 또 얼마나 다를지요. 하지만 지금 이 공항에, 게이트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가진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떠난다는 겁니다. 제가 집을 떠나왔던 것처럼,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지금 집을 떠나는 길에 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곳도 누구에게는 평생을 몸담아온 고향이고 떠나기 싫은 집일 테니까요. 가장 다양한 사람이 있는 공항에서 묘한 동질감을, 그것도 오랜만에 느끼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글을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쓰기 시작하니까 자꾸 할 말이 늘어나네요. 지난 주 편지는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는 말로만 가득 찼었는데.. 이 역시도 아이러니합니다.
아 참, 왜 공항에 왔는지를 얘기하지 않았네요?
전 지금 마른 하늘으으을 달려~ 런던으로 날아가는 중입니다!
- 아침 8시 54분, 비행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