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에는 근 2주 동안 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도 비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그것도 매일매일 내린 적은 없었는데 말이죠. 이곳의 장마는 원래 이리도 섣부른 3월에 찾아오는 것일까요?
비가 와서인지, 애먼 비를 탓하게 만드는 다른 이유에서인지,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운 며칠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는 단순히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기보다 그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있는 우울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시간과 환경을 본의 아니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날에 외출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며칠 연속으로 폭우가 내리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시간을 보낼 확률이 높으니까요. 오래도록 혼자 있다보면 무언가를 과도하게 돌아보게 되어 우울해지기가 쉽더라구요.
하지만 궂은* 것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런 비를 좋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굳이 시간을 들여 일기를 쓰고 이 메일을 쓰는,
구태여 돌아봄의 시간을 마련하는 저로서는 말예요.
*굳이 하는, 구태여 하는: 부사인 '굳이', '구태여'의 형용사형을 무엇으로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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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에 굴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밥을 해먹었습니다. 저기압성 강수가 만들어낸 저기압성 기분에 반항하기 위해 오랜만에 고기를 사서 구워먹었어요. (중학교 때 화장실에 아재개그인지 넌센스 퀴즈인지가 붙어있었는데요. 바람이 귀엽게 부는 곳은? - 분당. 뭐 이런 거 적혀있었는데 거기에 이것도 있었어요. 기분이 저기압일땐 고기 앞으로 가라...) 구워먹고 남은 고기를 넣어 파스타도 만들어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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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볶음밥을 해먹고 남은 소시지도 알뜰하게 부쳐먹었습니다. 아시안 마트에서 파는 스팸이 너무 비싸서 이번엔 스페인 마트에서 파는 일반 소시지를 샀는데, 맛이 거의 비슷하더라구요. 옆에는 루꼴라입니다. 지난 가족여행때 엄마가 선보인 루꼴라 초고추장 무침 스킬을 따라해 봤는데, 김치 저리가라 하는 맛이 나는 거 있죠? 향긋한 나물을 먹는 느낌이었어요. 추운 날 생각나는 누룽지에 닭곰탕 블럭국까지 먹으면 없던 힘이 솟아나는 기분입니다. (적어도 먹는 동안은 말이죠) 누룽지와 블럭국은 교환학생에게 동앗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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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미키17>을 관람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영화관에 갔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면,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영화가 더빙되어 상영됩니다. 더빙은 원작의 작품성을 변형할 뿐더러 상당한 어색함을 유발한다고 느끼는 저로서는 왜 여전히 더빙판이 더 많이 상영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볍게 유추해본 바로는 아마 스페인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길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비교해보면, 같은 뜻의 문장도 스페인어로 쓴 문장이 한국어 문장보다 훨씬 길거든요. 서로 다른 단어 형성방식과 구의 연결방식 등 여러 요소가 문장 길이에 영향을 미쳤겠지요. 그래서 한국어로 된 영화에 스페인어 자막을 쓴다면, 짧은 한국어에 비해 읽어야 할 스페인어가 너무 길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스페인 사람들은 말을 매우 빨리 하는 특징이 있는데요, 이를 활용해 자막 대신 더빙을 제작함으로써 원작과 속도를 맞추는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다행히 영어 원어 음성과 스페인 자막으로 영화를 보았는데요,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한국어 자막으로 다시 한 번 영화를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스페인 영화관도 구경해보고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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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동안 비가 그치고 푸른 하늘이 얼굴을 비춘 날도 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의 하늘이 가장 아름답다는 어릴 적 깨달음을 여전히 곱씹습니다. 간만에 쾌청한 날씨에 친구와 시내로 나가 치즈케이크를 먹었습니다. 피스타치오 치즈케이크 한 조각에 카페 라테 두 잔을 두고 오래도록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글로 적으니 그 순간이 더 따뜻한 색으로 덧칠되는 느낌이에요. 역시, 구태여 돌아보길 잘했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의 일상을 풀어놓았어요. (선택적으로 공개하는 일상임에 유의하세요!) 말라가의 소식을 전해드리지 않은 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요. 이곳에도 궂은 날은 있으며, 궂은* 마음으로 그것을 견딘다는 소식입니다. 그곳의 궂은 날을 위로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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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1.
원래 오늘 쓰려고 했던 주제는 '비겁과 만용'이었습니다. 비겁과 만용 사이에서 적절한 정도의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라서요. 어떤 주제에 있어 의견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그리고 무언가를 '안다'고 자신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용기를 가져야 비겁하지도 않고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 것일지 고민이 됩니다. 글을 쓰다 보니 <미키17>도 이 주제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크 러팔로의 캐릭터를 떠올리면 비겁이 만용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할 말이 있다면 남겨주세요. 진짜 아디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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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elo___oo
(아이디 중간에 언더바가 세 개나 되는데 다들 몰랐죠? 히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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