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많은 밤을 편지에 담게 될 것이라고, 메일링을 시작하며 말했었는데요. 그 말마따나 지금까지의 편지들 대부분은 밤에 적어내렸던 것 같아요. 뱉은 말은 지키자는 게 제 신조거든요. 는 무슨.. 신조가 있다면 밤이 되기까지 편지 쓰기를 미루자는 게 신조라고나 할까요. 정말이지,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창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새들의 날갯짓처럼 제 생각도 이리저리 떠도는 것 같아요. 한바탕 하루가 지나가고 밤이 오면, 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줄어듦과 함께 제 생각도 먼지가 가라앉듯 차분해집니다.
여러분에게는 "이것을 하면 무조건 기분이 좋아진다" 하는 황금 법칙이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어떤 가게의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노래를 들으면, 어떤 말을 들으면. 조건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존재요. 쓰면서 생각해보니 조건 없이 기분이 좋아지기는 꽤나 어려운 것 같네요. 어떤 날은 그 날의 모든 것이 조건이 되어 기분을 좋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럼 한 번 양보해서, "기분이 적어도 나빠지지는 않는다는 게 보장된다"하는 것은요?
오늘은 낮잠을 잤는데요, 자고 일어나서 곧바로 메일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몽사몽한 채로 낮잠에서 깨고 난 후의 기분을 생생히 적어내리고 싶었는데, 곧이어 밖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와 말라가 사람들의 활기에 주의를 빼앗겼습니다.
사실 낮잠은 제게 있어 무조건 기분이 '안' 좋아지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에요. 잠에 들 때는 좋지만, 깨고 나면 항상 심장이 쿵쾅거리고, 하루를 낭비한 것 같아 허무한 기분이 들어요. 한국에서부터 갖고 있던 습관인데요. 이곳에서는 낮잠을 자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적다 보니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낮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몸에 익어있는 감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더라구요. 여기에서 보낸 대부분의 날들이 한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잠이 선사하는 잉여로움은 썩 즐기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오늘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신에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들었다고 했지요. 이것도 유의미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이번 교환학생 생활이 제게 준 가장 큰, 어쩌면 가장 뻔한 깨달음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오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지만 그냥 한 번 기대해 보는 마음, 다들 품은 적 있으시잖아요? 그리고 지금, 한국에 돌아간 후에 보낼 날들을 그런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날들은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기분으로 살아갈 것임을 이미 알고있음에도요. 근거 없는 기대감이지만, 우리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그게 현재가 갖는 유일한 특권이 아닐까요!
과거는 그리워하고 미래는 두려워하면서 현재의 입지를 좁히는 것 또한 자주 범하는 습관이었는데, 현재만이 갖는 특권을 외치는 때가 오다니요. (전에는 현재의 특권은 언제나 제철음식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이 무슨 변화랍니까? 역시 괜한 기대는 하는 게 맞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