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샤워하시나요?
저는 물이나 샴푸가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샤워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보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특히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면 비몽사몽한 기운 때문인지 쉴 새 없이 여러 생각들이 휘몰아치곤 해요. 오늘 아침 샤워에서는 어제 들었던 노래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상상들이 펼쳐져서 아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거든요.
방을 청소하고, 짐을 마지막으로 챙기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공항 가는 열차를 타러 가려는데, 단말기에 제 카드가 인식되지 않는 것이에요. 신용카드를 찍고 대중교통을 타면 하루에 쓴 교통비 총합이 그날 새벽에 빠져나가는데, 알고 보니 전날 교통비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아서 카드 사용이 막힌 것이었어요. 전날의 교통비가 결제되기 전까지는 신용카드를 교통카드로 쓸 수도, 교통권을 구매할 수도 없거든요. 집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번거롭게 만들고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가는 말라가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요. "저는 지금 공항에 가는 길이고, 그래서 교통권을 딱 한 번만 사용하면 되는데 지금 태그도 충전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태그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요. 말라가는 하나의 교통권을 여러 번 태그하면 다인승 처리가 되기도 하고, 또 1회에 나가는 금액이 0.41유로라서 무리하지 않은 부탁이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이 말을 들은 말라가 분은 "교통권은 내릴 때도 태그를 해야 하는데, 그럼 우리의 하차 위치가 달라서 네가 나갈 수 없을 거다. 대신 내게 다른 교통권이 있으니 그 카드에 1회를 충전해주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것까지는 너무 죄송스러우니 괜찮다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아니라며 충전하면 된다고 곧장 키오스크 앞으로 가셨어요. 결국 그분의 동전과 제 동전 조금을 합쳐 그분의 교통권을 충전하고 그걸 사용했습니다.
연신 감사인사를 하고서 한숨을 돌리던 중, 제가 뻔뻔하게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도, 그분이 당연하다는 듯 도와주신 것도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웠다는 걸 깨달았어요. "방금 나 뭐지? 왜 그런 부탁을 자연스럽게 했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지하철에서 내려 공항가는 열차를 갈아타려는데, 모르는 아저씨가 제 커다란 캐리어를 보시고 "도와줄까?"라고 물으시며 올려주셨어요. 심지어 공항에 도착해 내릴 때는 또 다른 아저씨가 자연스레 캐리어를 내려주셨죠.
말라가는 정말로 그런 곳이에요. 카드가 인식되지 않았던 그때, 역에 들어오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해도 흔쾌히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제게는 있었어요. 캐리어를 올려주고 내려주셨을 때도 그들의 호의가 부담스럽지 않았고, 크게 송구스럽지도 않았어요. 그저 Gracias라고 말하며 가볍게 웃어보이면 되는 것이었죠. 10개월간의 말라가 생활이 제게 남긴 건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말로 정리하기 어렵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무언가요. 곱씹을수록 따뜻하게 느껴지는 무언가요.
아까 저를 도와주셨던 분은 제가 친구에게 전화하겠다고 하자 "No pasa nada"라고 말하셨어요. 직역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인데요. 괜찮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뜻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이에요. 사과하는 말인 "Perdon"이나 "Lo siento"에 대한 답으로도 많이 쓰이죠. 말라가에서 "No pasa nada"와 함께, 걱정하지 말라는 뜻의 "No te preocupes"라는 말을 정말 자주 들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마트에서 결제를 해야하는데 카드에 충전이 안 되어있을 때, 급히 핸드폰으로 충전을 하며 "Un momento por favor"(잠시만요)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No te preocupes라는 답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관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합의라도 한 것처럼, 적어도 제가 경험한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모두가 태평했어요. 그 점 때문에 답답하고 분한 적도 많았지만요, 처음 경험해보는 종류의 편안함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태평함이 밉다기보다는 "으이그"스러웠다고나 할까요.
떠나는 날이라고 팔불출 대박이네요 저... 아까 말라가 공항에서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말라가를 '이곳'이라 칭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곳'이라고 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어딘가가 찡해옵니다. 괜히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리고 싶어집니다. (이 말인즉슨 아직까지는 안 울었다는 뜻. 생각보다 강합니다?)
저는 지금 경유지 로마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반경 50m 이내에 동양인은 나 한 명 뿐이던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갑자기 모두가 한국어를 하는 환경이 되었어요. 이제는 제 뒤에서 다투는 커플의 이야기도 적나라하게 알아들을 수 있고,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트로트를 좋아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어요. 비행기를 기다릴 때는 교수님으로 의심되는 분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분과 불리는 분은 어떻게 이탈리아까지 함께 오게 되었을까 궁금했어요. 출국심사 줄을 설 때는 조금만 줄이 줄어도 바짝바짝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며 (물론 저도 포함), "아 나 한국 가는구나"를 체감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인들에 둘러싸여 괜한 불편함이 느껴진 것도 잠시, 이내 대구의 올여름 더위를 걱정하는 사투리, 어떤 아이에게 '서영아'하고 부르는 충청도 아저씨의 사투리가 들려오고... 피식 피식 웃음이 납니다.
20년간 살아온 한국에 이토록 새로운 마음으로 향하는 것.
말라가는 또 이런 것도 남겨주었네요.
고마웠다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안녕! |